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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9

SPECIAL

[소설가 박진규의 책 보고 간다] 어디선가 하지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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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진규의 책 보고 간다

어디선가 하지만 함께

 

박진규

소설가, <수사연구> 책임편집자


 

Emotion Icon<소설가 박진규의 책 보고 간다>는 책과 문화, 그리고 일상을 소재로 한 에세이가 담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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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7년 차 되어 가는 독서 모임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소설 《연인》을 읽었다. 노년의 작가가 10대의 강렬한 기억을 소환해서 쓴 소설로 이미 90년대 영화화되어 많은 인기를 끈 작품이기도 하다. 1930년대 베트남을 배경으로 가난한 백인 10대 소녀와 부유한 중국인 20대 남성의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을 나도 대학 시절에 읽었다.

 

 

1.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jpg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하지만 40대 중반에 독서 모임에서 읽은 《연인》은 20대 대학 시절에 읽은 소설과 같은 소설이었나 싶을 만큼 감상이 달랐다. 20대의 나는 이 소설의 충격적인 소재와 그 소재를 감각적인 문체와 플롯으로 재구성한 방식에 감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여운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40대에 읽은 《연인》은 달랐다. 이 소설에 느껴졌던 건 관능이 아니라 결핍의 서사였다. 먼 식민지에서 모든 것을 잃은 채 세 자녀를 데리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어머니, 점점 피폐해져 가는 어머니의 내면. 당연히 그 가족은 점점 무너져간다. 폭력적인 큰아들과 그런 큰아들 밑에서 무기력한 작은아들. 그 가족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10대 주인공의 벗어날 수 없는 현재의 삶. 그 주인공이 그 결핍된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주인공이 부유한 중국인 남성의 손을 잡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연인》의 10대 주인공의 욕망은 사랑이라기보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탈출구에 가까웠을 테니. 하지만 그 중국인 20대 남성 역시 부유한 집안의 천덕꾸러기 같은 결핍된 사내였다. 그 결핍된 두 영혼끼리 함께 마주 보는 것이 《연인》의 서사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연인》의 마지막 장면은 나이 든 중국인 부호가 작가가 된 주인공을 다시 찾아오는 내용이었다. 독자에 따라 어찌 보면 불편할 수 있는 전개와 달리, 이 소설의 마지막은 두 사람이 이미 지나간 강렬한 과거를 짧지만 은은하게 회고하는 여운 짙은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은 아니라도 지난 시절 그것도 잊고 싶던 인생의 피폐(패피 아니고 피폐다) 시기에 알고 지낸 사람과 재회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공교롭게도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인연이 끊겼던 사람들과 다시 우연히 만나는 일들이 잦아졌다. 세상이 넓다면 넓지만 좁다면 또 좁은 모양이었다. 

 

2014년 함께 책을 만들었던 출판사의 신입 동갑내기 편집자와 홍대입구역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그 근처에 있는 나름 큰 출판사에서 7년 넘게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또 서울역에서도 국문과 옆 영문과에 다니던 친구와 10여 년 만에 재회했다. 보자마자 내가 얼굴을 알아본 게 신기했고, 여전히 반가운 게 신기했다. 물론 서로 바빠서 점심을 먹자는 약속은 아직 못 지켰다. 그리고 중고교 시절의 한동네에 살아서 더욱 친해진 친구에게도 거의 15년 만에 연락이 왔다.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면서. 그 친구는 이제 작가 친구가 생겼다고 기뻐했다. 최근에 만났더니 나의 탈모가 걱정된다면서 헤어토닉까지 선물해 줬다.


결정적으로 지난달 20대 중반 임금 체납으로 함께 괴로워했던 N사(네이버가 아님)의 직장동료에게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진규 씨 잘 지내셨어요?」

「어, 선배님이세요. 혹시 이거 피싱 아니겠죠?」

「ㅋㅋㅋ」


농담 몇 마디에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그때 같이 일했던 수석 기자와 연락이 되어서 나에게도 연락을 주셨다는 것이다. 당시 잡지사 N사의 임금 체납으로 우리는 거의 반년을 바보처럼 끌려다니며 지내왔다. 그 사이 임금 등등의 문제로 바뀐 편집장만 4명에 이르렀으니 회사 사정은 알 만할 것이다. 그래도 매달 마감은 다가왔지만, 월급은 나날이 미뤄졌고, 편집장들은 본인 몫의 급여만을 챙겨 퇴직했다. 그런 상황에도 우리들은 서로 3남매라며 의리 있게 뭉쳐 다녔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도 했지만, 또 은근히 서로 죽이 잘 맞았다. 결국 밀린 급여에 대한 정산도 완전히 받지 못하고 퇴사한 가슴 아픈 기억으로 결말을 맺었지만 말이다.

 

2. 20대 함께 힘든 직장생활은 세 사람이 20년이 훌쩍 지난 후에 다시 만났다..jpg

▶ 20대 함께 힘든 직장생활은 세 사람이 20년이 훌쩍 지난 후에 다시 만났다. ©박진규

 

 

20대 중반 압구정동의 사무실에서 매일 만났던 우리는 20년 후 합정역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각각 두 아이의 어머니셨고, 나는 두 고양이의 집사였다. 그리고 20년 사이 각자의 인생에는 행복도 있고 깊은 시련의 굴곡도 있었다. 여기에 쓰기는 조심스럽지만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30대와 40대에 겪을 수 있는 아픔들이었다. 이유는 각자 다르지만 다행히 지금은 다들 회복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3. 우리의 인생에는 힘든 시절 서로 의지했던 존재들이 있다. 문득 그들과 어디선가 하지만 함께 슬픔과 기쁨의 인생길을 동행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jpg

▶ 우리의 인생에는 힘든 시절 서로 의지했던 존재들이 있다. 

문득 그들과 어디선가 하지만 함께 슬픔과 기쁨의 인생길을 동행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진규

 

 

그날 오후 함께 3차에 걸쳐 식사, 커피, 빵의 코스를 밟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인생에는 힘든 시절 서로 의지했던 존재들이 있다. 문득 그들과 어디선가 하지만 함께 슬픔과 기쁨의 인생길을 동행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 만에 만났지만 우리 3남매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으쌰으쌰, 서로를 응원하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리고 N사에서 마지막 시기에 함께 합류했던 M기자님 혹시 이 글 보시면 연락주세요. 당시 수석 기자님께서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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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소설가, <수사연구> 책임편집자

 

소설 및 대중문화 칼럼을 쓰면서 대한민국 유일의 범죄전문 잡지 <수사연구>의 책임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2005년 장편소설 《수상한 식모들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