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40
SPECIAL[소설가 박진규의 책 보고 간다] 뽀뽀의 재발견
소설가 박진규의 책 보고 간다
뽀뽀의 재발견
박진규
소설가, <수사연구> 책임편집자
<소설가 박진규의 책 보고 간다>는 책과 문화, 그리고 일상을 소재로 한 에세이가 담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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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의 대표작이자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삶의 한가운데》를 뒤늦게 읽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니나는 남들이 인정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간다. 나치 지배 시절에 유태인을 탈출시키는 독일인이 되기도 하고, 훗날 작가로 성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잘못된 결혼으로 삶에 짓눌리기도 하고, 가끔 자신의 삶에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니나 옆에는 그녀를 지켜보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연상의 남자 슈테판이 있다. 슈테판은 니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준다. 슈테판은 니나의 열정과 인생관을 사랑하고, 숭배하고, 늘 그 옆에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니나는 슈테판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니나가 보기에 자신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니나와 슈테판은 단순한 남녀 관계보다 좀 더 복잡한 은유를 품고 있는 듯 보인다. 예술가와 그 예술가를 동경하는 사람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하고,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읽은 내내 슈테판의 니나에 대한 숭고한 ‘덕질’이 느껴지기도 한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고지식한 지식이었던 슈테판은 니나를 통해 격정적인 삶을 엿본다. 그리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에 매료되면서 그의 삶 역시 달라진다. 슈테판처럼 니나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종종 어떤 ‘대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눈을 뜨게 된다. 그 대상을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 삶의 일상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 삶의 한가운데와 뽀뽀 ©박진규
내게도 그런 대상이 있다. 2021년 새해에 만난 ‘뽀뽀’가 그렇다. 그해 겨울이 엄청 추웠는데, 젖소 무늬의 새끼 고양이가 내 작업실 현관 앞에서 울고 있었다. 2층 세입자가 옥상에서 키우던 고양이였는데 주인이 잠시 여행을 떠난 사이 혹한이 밀어닥친 것이었다. 내가 울음소리를 듣고 현관을 열자 ‘뽀뽀’가 내게 들어왔다.
나는 그 이전에 고양이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었다. 고양이란 그냥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사나운 존재이며, 새벽에 기분 나쁘게 우는 존재였다. 2층 옥상에서 키우는 고양이들도 내게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들오들 떠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내게 안기는 순간 그 고양이 뽀뽀는 큰 의미가 됐다. 그 후로 뽀뽀는 2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겨울 내내 나와 함께 지냈다. 또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는 뽀뽀의 집사가 됐다.
나는 유순하고 겁 많은 뽀뽀와 지내면서 일상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이후 다른 두 고양이를 더 키우게 되면서 뽀뽀가 얼마나 순한 고양이인지 알게 됐다.) 고양이가 집사의 품에 ‘구글’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지를 처음 깨달았다. 새벽 여섯 시 뽀뽀가 배 위로 올라와 꾹꾹이 알람으로 나를 깨워주는 것도 처음 체험했다. 또 이 조용한 고양이가 대단한 변신술을 보여주는 것에도 깜짝 놀랐다. 고양이가 방석이나 빨랫감으로 변할 수도 있다니!
▶ 방석으로 변한 뽀뽀 ©박진규
▶ 빨랫감으로 변한 뽀뽀 ©박진규
무엇보다 나는 행복을 인생에서 거창하고 화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뽀뽀와 함께 지내면서 일상의 소박한 행복이 주는 즐거움이 그에 못지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아침에 뽀뽀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며 ‘뽀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순간이 내게는 굉장히 행복한 일상이다. 그리고 ‘뽀뽀’와 함께, 뽀뽀와 성격은 다르지만 사랑스러운 다른 고양이들과 더불어 앞으로도 이 인생의 여행을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사실 나는 원래 ‘뽀뽀’라는 단어가 약간 좀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뽀뽀라는 단어는 내게 미소를 짓게 하는 몇 안 되는 말 중 하나다.
▶ 여행가방을 열면 항상 들어가보는 뽀뽀 ©박진규
박진규
소설가, <수사연구> 책임편집자
소설 및 대중문화 칼럼을 쓰면서 대한민국 유일의 범죄전문 잡지 <수사연구>의 책임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2005년 장편소설 《수상한 식모들》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