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서울책보고
이태수의 시집, 《우울한 비상의 꿈》
인스타그램 업로드_2022년 5월 20일
서울책보고에만 있는 희귀하고 놀랍고 의미 있는 혹은 재미있는 책을 소개하는
오직서울책보고 오월의 북큐레이션 컨셉에 따라 오늘도 절판된 시집 한 권 들고 찾아 왔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 시집 또한 웹진 '오늘의 헌책'코너에서 간략하게 소개했던 시집인데요.
이 시집은 '문학과지성 시인전' 24번으로 1982년에 초판이 나온 '문학과지성 시인전' 초기 시집입니다.
1970년에 계간 <문학과 지성>을 창간했고, 이 시집에 해설을 쓰기도 한 평론가
김병익은 이태수 시인의 이 시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네요.
*
"말(언어)이 야생의 고삐 풀린 말처럼 자유롭게 외쳐질 수 있는 세계로 뛰어들게 된다.
그 세계는 말이 <사랑>으로 발해질 수 있는 세계이며
시인 이태수가 꿈처럼 별처럼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세계이고,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가 아름답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소망하는 <사랑의 나라>이다.
그곳은 '사랑으로 지어진 집, 사랑으로 서 있는
기둥, 사랑으로 자라는 풀
잎, 사랑으로 숨 쉬는 먼지,
사랑으로 물들어진 종이, 그 위에
사랑의 글씨만 씌어진' 「어떤 사랑나라」인 것이다.
시는 물론 그 같은 사랑나라를 위하여, 향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_김병익, 해설 '꿈과 기다림, 혹은 말을 위하여' 중에서
캬~! 1980년대 시집은 '해설'도 한 편의 시와 같네요.
'시는 사랑나라를 위하여 향하여 존재하는 것이다'라뇨!
1980년대 한국의 한 시집 안에 담긴 시의 정의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평론가가 말하듯 이 시집의 세계는 '사랑'이 말로 발해진 그런 세계인데요.
첫 시 '어떤 사랑나라' 일부 읽어볼까요?
*
사랑으로 빚어진 떡, 사랑으로
빚어진 술, 사랑으로 만들어진
안주, 사랑으로 만들어진 바람만
마시고 먹는 나라.
사랑으로 지어진 집, 사랑으로 서 있는
기둥, 사랑으로 자라는 풀
잎, 사랑으로 숨쉬는 먼지,
사랑으로 물들어진 종이, 그 위에
사랑의 글씨만 씌어진 나라. 사랑의
밥을 먹고, 사랑의 옷을 입고, 사랑
의 국물을 마시고, 기침도 사랑처럼 하는
그런 별나라. 언제나 바뀌지 않는 사랑의
눈빛과 가슴들이 공기처럼 흐르는, 사랑만 숨쉬는
내 누이의 꿈속의 유리알 같은,
그런 먼 나라.
이 지상 늪에서 보면
언제나 저만큼 가물거리는,
꿈꾸는 내 누이의 꿈속의 먼 나라, 머나먼
저쪽의 불켜진 사랑의 나라.
*
떡도 술도 안주도 사랑으로 만들어졌고,
집도 기둥도 풀잎도 심지어 먼지까지 사랑으로 숨 쉬는 나라.
엄혹한 1980년대 초반의 현대사를 지나면서도,
시인의 세계에서만큼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랑의 나라로 꿈꾸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아주 먼 비전이었겠지요.
이 시집이 온통 사랑투성이인 게 심지어 30여 년 전에
이 시집을 고른 시집 주인 또한 이런 메모를 남겨두었답니다.
*
"사랑하구 싶다. 한번두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없으면서도 뒤돌아보면 조금은 사랑한 얼굴들…"
88.8.11 을지서적 ○○○
지금은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 낯선,
어쩌면 유행 지난 그런 단어처럼 여겨지는데요.
이 1982년의 시 세계에서는 '사랑'이 시인의 단어이기도 하고,
평론가의 해석 언어이기도 하며,
이 시집을 구매한 누군가의 갈망이기도 했네요.
당대의 감수성을 오롯이 품은 이 오래되고 얇은 시집들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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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네일 사진 : 을지서적이 있던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 화이트페이퍼